domingo, agosto 17, 2008

'좌파'와 '정치'에 대한 단상

'좌파'란 사전적으로 '어떤 단체나 정당 따위의 내부에서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경향을 지닌 파'를 의미하며, '좌익'이라고도 불린다. 이 명칭은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 시절 의장석에서 바라볼 때 왼쪽에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가운데에 중간파가, 오른쪽에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의석을 잡은 데에서 유래되었다. 그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좌파'에는 항상 '진보'와 '급진'이란 단어가 함께 한다. '진보'란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을 의미하며, '급진'은 '목적이나 이상 따위를 급히 실현하고자 함'을 뜻한다. 즉 '좌파'는 사회의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간혹 성급하게 성과를 내고자 함으로써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만약 인류의 역사를 민주주의 확대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좌파'는 역사적으로 볼 때 분명 민주주의 발전의 동력으로 기능하여 왔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파'와 '민주주의'를 등가관계로 놓을 수는 없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말하며,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 민주주의는 현재적인 개념이다. 민주주의에서는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 따라서 오늘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좌파'의 범주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변화와 발전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존중한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좌파'가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수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좌파'는 다수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좌파'가 다수였던 사회는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우파'가 다수였던 사회도 많지 않다. 사실 확고한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그때 그때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나는 '좌파'다, '우파'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다. 물론 그들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다수의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현실 정치이다. 사회의 헤게모니를 잡는 것, 그것이 바로 현실 정치의 최종 목표이다.
지난 10년 소위 '좌파' 정권이 우리 나라를 통치하였다. 1987년 민주화, 그리고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며 대한민국의 민중은 좌파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지금 민중은 다시 우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 10년 간의 삶이 그들에게 이로웠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민중의 모습이다. 민중은 현실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이다. 지난 10년 좌파 정권의 실패는 이러한 현실로부터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괴리는 아마도 현실을 잘 몰랐거나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정치력을 가진 소수는 다수를 쉼 없이 설득하여야 한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도록 관심을 가지고 설득하여야 한다. 여기서 그들의 정치적 힘은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고 민중에게 접근하느냐에 달려있다.
설득은 단순히 민중이 바라는 대로 따른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중의 원하는 대로 따라서는 이도저도 안되는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민중은 단일한 집단이 아닐 뿐더러 그들에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중요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는 오늘의 민중뿐만 아니라 내일의 민중도 고려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 줄도 알아야 한다. 정치가는 오늘은 물론이고 내일을 예측할 줄 알아야 하며, 민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좌파'는 오늘을 어떻게 보며 '내일'을 어떻게 설계하고 있을까? 그리고 민중을 설득하기 위해 어떠한 '진단'과 '처방'을 내놓을 수 있을까? 민중은 하루가 다르게 똑똑해져 가고 있다. 쉽게 설득당하지도 않으며 정치가에게 끊임없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가가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지만 사회를 주도해 나가며 역사에 자신을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선택받은 소수가 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수고와 고생 역시 당연한 것은 아닐까.
나의 한 표가 고민하는 정치가를 기다리고 있다!!!

viernes, agosto 15, 2008

한국은 라틴아메리카 전문 웹진 Boom?

2008년은 어쩌면 한국에서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연구에 있어 기념비적인(?) 해가 아닐까 싶다. 올해 들어 라틴아메리카 전문 웹진이 세 개나 탄생하였다.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소장 김창민 교수)에서 발행하는 웹진 "TransLatin",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소장 정경원 교수)에서 발행하는 웹진 "Latin American Issues", 그리고 부산외국어대학교 이베로아메리카연구소(소장 김우성 교수)에서 발행하는 웹진 "Latin America"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창간호 발행 순서)

라틴아메리카 전문 웹진의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은 서울대학교의 라틴아메리카연구소였다. 라틴아메리카연구소는 지난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인문한국(HK)사업 유망연구소로 선정되면서 라틴아메리카 지역연구의 허브로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목표 아래 연구소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각종 강연회와 학술발표회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연구소로서 학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웹진의 발행을 기획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2008년 3월 첫 선을 보인 웹진 "TransLatin"이다. 창간사를 통해 김창민 소장은 이 웹진이 "trans-"라는 접두어의 의미처럼 지역과 세계, 특유성과 보편성, 전문성과 대중성, 분과학문 간, 소통의 장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경계 허물기의 역할을 담당하길 바란다고 창간 의도를 밝혔다. (웹진 "TransLatin"의 창간은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에 소개되었다.)

중남미연구소의 웹진 "Latin American Issues"는 2008년 6월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남미연구소는 작년에 홈페이지를 새롭게 개편하면서, 소장 인사말을 통해 라틴아메리카를 우리의 언어와 시각으로 보면서 새롭게 접근한다는 목표를 밝혔다. 한편, 이 웹진은 다른 두 연구소의 웹진들이 별도의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팝업창을 띄우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전문 웹진의 막내인 이베로아메리카연구소의 웹진 "Latin America"는 2008년 7월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베로아메리카연구소는 라틴아메리카연구소와 더불어 작년에 인문한국(HK)사업 유망연구소로 선정된 바 있다. 한편, 김우성 소장은 웹진의 창간에 대하여 그 동안 서구 편향의 시각에 가려졌던 라틴아메리카의 참모습을 우리 시각에서 들춰보고 싶었다며, 라틴아메리카가 미국발 신자유주의에 속수무책인 우리와는 달리 당면한 현실과 미래에 대해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여 왔음을 강조하였다. (부산일보에서 웹진 "Latin America"의 창간 소식을 전하였다.)

지금까지 "TransLatin"은 2호를, "Latin American Issues"와 "Latin America"는 각각 1호씩 웹진을 발행한 상태이다. 국내의 열악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연구 풍토를 감안한다면, 웹진의 미래가 그렇게 밝은 것만은 아니다. 얇은 연구자 층과 낮은 사회의 관심 속에서 흔들림 없이 웹진을 발행해 나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세상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연구자들을 독려하면서 웹진의 기반을 튼튼히 해 나간다면 다른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으로서, 이제 그 시작을 알린 세 웹진들이 아무쪼록 아직 불모지와 다름 없는 한국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연구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폭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lunes, agosto 04, 2008

Impresión del programa del primer día de CV2008

드디어 엘 에스꼬리알에서의 첫날 일정이 모두 끝났다. Ana Pellicer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Carlos Monsiváis의 강연, 그와 Basilio Baltasar의 대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글쓰기와 생각하기"라는 주제에 대한 토론까지(Edmundo Paz Soldán 추가) 예정보다 30분 늦은 11시에 시작하여 오후 6시까지 이어진 대장정이 모두 끝난 것이다. 오늘 일정에 대하여 총평을 한다면, 강연자 및 토론자로 참석한 인물들의 무게에 비해 주제나 일정 진행이 지나치게 모자른 게 아닌가 싶다. 특히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YJ와도 의견을 같이한 부분이다.- 토론회였다. 이번 토론회의 제목이 너무 광범위해서 어떻게 토론회가 진행될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였는데, 실질적으로 토론회에서 다룬 것은 "정전"에 대한 문제였다. "청소년들에게 어떤 작품을 읽혀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지난 번 Casa de América에서 열렸던 Feria del Libro de Madrid del 2008 기념 토론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뻔한 문제제기와 답변밖에 나올 수 없는 문제를 주제로 삼음으로써 많은 기대를 품고 참석하였던 나로서는 실망감이 적지 않았다. 물론 "정전"이라는 문제는 문학(비평)을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주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까를로스 몬시바이스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단 4명의 토론자가 참가하는 토론회에서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주제였다. 1시간 30분 가량 여러 사람이 "정전"에 대한 자신의 의견들을 펼쳤지만, 결국 예전부터 항상 이야기되어 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발표들에 한정되고 말았다. 오전에 있었던 까를로스 몬시바이스의 강연과 그의 바실리오 발따사르와의 대화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보겠다. 그리고 오늘 밤에 있는 영화 상영 역시 따로 포스트를 마련하겠다.

Un día antes de la inauguración del curso

어젯밤에 산 로렌소 데 엘 에스꼬리알에서의 첫 날에 대한 인상을 글로 남기려 했으나,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만남이 길어진 관계로 이제서야 노트북을 폈다. 사실 엘 에스꼬리알에는 세 번째 방문하는 것이지만, 세 번이라는 횟수와 상관없이 과다라마 산자락 밑에 있는 이 작은 도시는 언제나 낯설기만 하다. 방문자에게 속을 내보이지 않고 무엇인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엘 에스꼬리알을 한 두 번 들러서는 이 도시의 진정한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번 방문에서 가장 색다른 점은 물론 단순한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수업 참가를 위해 왔다는 데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이 곳에서 잠을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엘 에스꼬리알의 밤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새롭다. 살라망까나 똘레도만큼 크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 않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옛날 분위기 물씬 풍기는 거리와 건물들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어쨌든 첫날 밤을 무사히 보내고 오늘 수업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지. 행사장으로 향하는 나의 심정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sábado, agosto 02, 2008

El proyecto de la "Unibol" de Evo Morales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대통령은 오늘 세 개의 인디오 대학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Unibol"(Universidad Indígena de Bolivia)이라 불리게 될 이 대학들에서는 모든 수업이 각각 아이마라어, 께추아어, 과라니어와 같은 토착어로 진행된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이 대학들을 통해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탈식민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특히 이 중 한 대학은 옛 미군기지터에 세워질 예정이라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 대학들의 설립과 운영을 위해서는 별도의 기금이 조성되어 있으며, 기존의 공립대학에는 피해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단서도 달았다. 한편, 스페인의 몇몇 일간지들은 이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토착어로 연설한 것은 외무부 장관인 다비드 초께완까(David Choquehuanca)뿐이었으며, 에보 모랄레스 본인과 교육부 장관인 막달레나 까히아스(Magdalena Cajías)는 스페인어를 사용하였다고 비꼬듯 전하며, 소위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 인사들에 대한 그들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한 국가 내에서 복수언어를 사용하는 것, 아니 더 나아가 권장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의미와 장단점을 지닐까? 물론 우니볼에서도 스페인어는 영어와 함께 배워야 할 필수과목이 될 것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였지만, 다양한 언어, 특히 기존 사회에서 소외되고 천시받던 언어들의 장려는 찬성론자들이 흔히 말하듯 그 사회의 문화를 살찌우는 밑거름이 될 것인지, 아니면 사회를 분열시키는 악재가 될 것인지 그 결과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언어는 항상 권력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책의 결정과 시행은 많은 논란을 야기해 왔다. 이번 모랄레스 정부의 결정이 볼리비아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jueves, julio 17, 2008

¿Porqué no ha podido ganar el Premio Nobel la Literatura Coreana?

지난 3월 6일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김성곤 교수는 서울신문에 "한국문학, 왜 노벨문학상 못 받을까?"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사설을 기고하였다. 사설에서 김 교수는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우선 국력이나 국가의 이미지가 약한 현실을 꼽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현실이 해외 출판시장에서 한국문학의 상업성 약화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그렇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문학이 세계문학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과거의 민족문학이나 민중문학의 전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거나 개인의 사적인 고뇌, 가족 간의 갈등, 불륜의 미화 등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작금의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흐름에 크게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문학에서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매슈 펄의 "단테 클럽",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J. K. 롤링의 "해리 포터"와 같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절대적 진리나 신념에 대한 회의, 또 하나의 진리나 감추어진 역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대립,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타파, 경계 해체, 스스로를 진리나 순수혈통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독선과 횡포 그리고 그들로부터 차별받는 소수그룹과 혼혈들의 발견과 인정 등이 지난 60년대 이후 전 지구적으로 시작된 거대한 인식의 전환을 잘 반영해주는 공통 관심사이다. 따라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라는 우물에 갇혀 있지 말고 세계 작가들과 소통하여야 하며 그러다 보면 고유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니는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고 자연스럽게 한국문학에게도 세계문단의 인정과 노벨문학상이 주어질 것이라며 김 교수는 사설을 마무리 짓는다.
분명 노벨문학상의 수상은 국가적인 명예이자 높아진 한국문학의 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과연 김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한국작가들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일면 수긍하는 부분들도 있겠지만, 머리를 갸웃 거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문학의 가장 큰 약점은 언어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인들이 한국문학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언어로 한국문학이 번역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번역인프라는 조약하기 그지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그들 문학의 번역사업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문학번역원 등에서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펼치고 있지만 우리의 두 이웃 국가와 비교해 보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또한 한국작가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한국의 작가들은 그저 작가로서 안주하는 경향이 높은 것 같다. 마치 세상사와는 상관없는 제 3자인 것처럼 살아가는 작가들이 많아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인들의 존경과 관심을 받는 작가들은 단순히 '작가'라는 범주를 넘어서 이 시대의 '지식인'이자 '지성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글뿐만 아니라 행동으로서 그들의 사상과 신념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작품인 것이다. 한국문단에는 그러한 작가들이 부족해 보인다. 혹은 '지식인'이나 '지성인'을 잘못 이해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이 시대의 '지식인'이나 '지성인'으로 불리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적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그에 따른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과 대안을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작가'의 모습이다.
문학(비평)을 전공하는 한 학도로서 한국문학이 한층 더 발전된 모습으로 성숙하기를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해 본다.

martes, julio 15, 2008

Una carta de VANK

VANK es un organismo no gubermental e institución de acción voluntaria conformada por estudiantes primeros y secundarios para transmitir las informaciones correctas sobre Corea destinadas a las editoriales.

Aquí os presenta una carta titulada "la verdad del saber", con la que les ruega a las editoriales que corrijan informaciones erróneas o incorporen nuevas informaciones sobre C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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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a es un país con una historia de 5.000 años, los tesoros culturales acordes a esa historia y que ha logrado un crecimiento económico vertiginoso, pero en los libros de estudio y los materiales impresos no se conocen estas imágenes de Corea. Especialmente, durante la exitosa realización de los Juegos Olímpicos 1988 de Seúl y el Mundial de Fútbol 2002 Corea-Japón se han mostrado a los medios periodísticos de todo el mundo las imágenes de una Corea desarrollada pero aún son mínimas las informaciones para presentar y comprender a Corea en los libros de estudios en el extranjero.

Más que nada los materiales sobre Corea que están presentes en los libros de estudio en el mundo no son materiales directos, sino que son materiales tragiversados por Japón y China. Como ejemplos se pueden nombrar el hecho de presentar el "Mar del Este" como el "Mar de Japón", presentar a Corea que es uno de los 13 países más desarrollados económicamente como un país subdesarrollado de economía agrícola, decir que Corea tiene 2.000 años de historia mientras que la verdad es que tiene más de 5.000 años y decir que Corea es un país dependiente de China y Japón.

Todos estos contenidos erróneos son contenidos de presentación sobre Corea que están en los libros de estudio de Japón y que fueron transmitidos a todo el mundo por los estudiosos japoneses durante la ocupación japonesa de Corea entre los años 1910 y 1945.

※ → What Japanese textbooks say

※ → Fact and fallacies Korea in international textbooks

※ → Truth in scholarship

Sé que su institución hace diversos esfuerzos para comprender las diferentes culturas y países en este siglo XXI de la globalización e informatización. Pienso que los libros de Estudios Sociales y de Geografía impresos por su institución ayudan a muchos estudiantes de su país para que comprendan más exactamente a otros países y otras culturas.

Si sus libros de texto contienen informaciones erróneas sobre Corea y tienen planes para corregirlas o incorporar nuevas informaciones, espero que se comuniquen con nosotros.

Poseemos valiosos materiales de estudio y de comprensión, materiales fotográficos digitales sobre la historia y la cultura coreana recolectadas voluntariamente por los más de 10.000 miembros de VANK compuestos por estudiantes primarios y secundarios. Se los enviaremos por correspondencia y por Internet a su institución sin ningún costo alguno para ustedes.

Nuestro deseo es que a través de nuestros esfuerzos voluntarios los estudiantes extranjeros de todo el mundo puedan acercarse a una correcta historia y cultura de Corea y que a través de ello compartir el sueño y la amistad con la gente de todo el mundo.